Book

김숨, <한 명>

perfectworld 2016. 10. 31. 00:53

기억의 의무

소설 <한 명>은 시간이 흘러 위안부피해자가 단 한 명 남게 되었을 때를 가정하고 쓰인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한 명의 위안부피해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를 말하는 것으로, 등록되지 않은 또 다른 피해자인 주인공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피해자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만주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기를 내내 망설이다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삶(현재)과 기억(과거)을 쉴 새 없이 오가며 그녀(실제 위안부피해자들이) 만주에 끌려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녀가 마지막 한 명을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에는 유독 동물적 상징이 많이 등장한다. 김숨 작가에 대한 논문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옷 수선 가게 여자가 키우는 어미 개였다. 옷 수선 가게 여자는 새끼를 내다 팔아 돈을 벌기 위해 어미 개를 임신시키고 출산시키기를 반복한다. 50번 정도를 그렇게 했다고 본 것 같다. 이 대목이 유독 인상 깊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만주에서 그녀가 겪었던, 목격했던 일들과 닮아 있기 때문이었다. 임신한 상태로 군인을 받아야 했던 미옥 언니, 임신하는 대로 아기를 지워야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다. 50번이 넘는 출산과 임신, 그 과정 속에서 어미 개의 생각, 의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어미 개소녀들은 무력한 존재였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도,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가 그의 의견을 귀 기울여 들어주지도 않는, 그리하여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

 

그녀의 기억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돌연 재생된다.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의 기억이 그러하듯이, 그들의 기억은 단편적이고 지독한 데가 있다. 일상의 순간을 비집고 들어온다.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던 것처럼,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은 결코 매끄럽지 못하다. 프리모 레비의 에세이와 <안네의 일기>의 기억은 비교적 질서정연하다. 그들의 기록은 시간 순대로 전개되고 고유명사(위치, 건물의 이름 같은 것들) 역시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위안부피해자들의 기억은 그렇지 못하다. 정확하지 않고 논리적인 전개도 아니다. <녹음기와 두 여자>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 역시 증언을 기록하기 위해 수집하는 일이 그들에겐 트라우마를, ‘마비된 기억을 다시 재생시키도록 요구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증언을 기록하는 자의 의무는 단순히 기록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안는 것까지 포함하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토론이 있기 전에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 교수님께서 이러다가 우리 학생들이 한 시간 반 동안 피해자 할머니들을 불쌍하게 여기다가 끝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셨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간 아차 싶었다. 스스로 사유를 게을리 한 것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나는 자주 인간은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다른 존재를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동시에 쉽게 이해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자주 실수를 범하는 것 같다고. 우리는 타인을 자주 오해하고 또 사유의 의무에서 쉽게 도피하는데, 그건 분명 그렇게 하는 편이 더 쉽고 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는 위안부문제와 관련한 역사를 조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사실은 조금 겁이 났다. 나는 역사를 교과서로만 배웠다. 조금 더 보태자면 위인전, 역사 관련 책을 몇 권 읽은 정도가 전부다. ‘위안부문제에 대해서는 위인전을 읽은 것도 아니고 관련 책을 따로 찾아 읽은 기억도 없어서, 결국 교과서에 등장했던 몇 줄로 배운 것이 전부다. 발표 자료를 찾으면서 봤던 설문 조사 결과 중에 스스로 위안부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조사가 하나 있었다. 물론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렇게 답했을 것이다. 질문을 보고 잘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어느 정도로 알아야 잘 안다라고 답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름은 까맣게 잊었지만 그 누군가가 소리 없이 울던 걸 기억하는 것./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정확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녹음기와 두 여자> 속의 질문처럼, 교과서 등을 통해 배우는 역사와 실제 피해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역사 속 개인의 흔적,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정확한 기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떤 쪽을 기억해야 할까? 토론에서 내내 뜨거웠던 논쟁 역시 이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들의 삶과 내면을 알아가는 것, 그리하여 그들에게 공감하는 것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정책 등에 관심을 가지고 진행을 촉구하는 것. 토론을 진행하는 동안 내 혀끝에서 내내 맴돌았던 생각은 둘 모두가 존재해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나의 문제를 두고도 서로의 의견은 스펙트럼처럼 다양하게 펼쳐져 있기 마련이다. 서로의 의견차를 설득으로 좁혀나가고 서로의 타협점을 계속해서 찾기 위해 노력한다면 스펙트럼 어딘가에서 혹은 그 밖에서라도 괜찮은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나는 어느 쪽도 등한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인의 흔적들이 고려되지 않은 역사는 단지 연도와 피해자의 숫자,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자면 감정 없는 단편적인 사실들의 나열로 끝나버리지 않을까.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 기억해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은 오히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닌 개인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일 테니까. 역사를 생각하면 늘 그 규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곤 했는데, 어쩌면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문제들을 인식하고 또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기까지 그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위안부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가져왔던 이 문제와의 거리감을 얼마간 좁혀주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끝으로, ‘기억의 의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고속버스가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육하원칙에 충실했던 내 질문들이 실은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깨닫는다. 내 질문들은 할머니의 조각조각 난 기억들을 이어주기는커녕 더 낱낱으로 흩뜨려놓았다."


증언자가 결심하기까지, 그리고 증언 이후에 그것을 기록하는 자에게 오는 것들, 증언을 들음으로써, 읽음으로써, 봄으로써 우리에게는 기억의 의무가 주어지는 게 아닐까. ‘사건은 발생과 동시에 당사자와 제3자를 가른다. ‘위안부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문제들을 두고 우리는 스스로의 역할을 선택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기억의 의무를 나누어가진 당사자로서의 삶과 그저 몇 줄의 역사로 인식할 뿐인 제3자로서의 삶, 그 사이에서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