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pg.11) 열여섯병. 공교롭게도 우리가 함께 산 햇수와 똑같았다. 아내가 내려놓고 간 밀봉된 시간의 단위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순간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병에 일년씩의 시간을 지워나가는 기분으로 아내의 술을 마셔 없앴다. 아내의 컬렉션 중에는 귀한 술도 몇병 있었다. 거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쩐지 그 병들은 우리의 십육년 중에 최고의 시절을 담고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pg.14)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남편과 관계..
나는 당시 내가 그 얼굴을 아름답게 생각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pg.21) 왜 그런 것일까? 왜 예전에 아름답던 것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행복이 불행으로 막을 내리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 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