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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중국식 룰렛>

perfectworld 2016. 11. 12. 19:03

<중국식 룰렛>

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pg.11)

열여섯병. 공교롭게도 우리가 함께 산 햇수와 똑같았다. 아내가 내려놓고 간 밀봉된 시간의 단위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순간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병에 일년씩의 시간을 지워나가는 기분으로 아내의 술을 마셔 없앴다. 아내의 컬렉션 중에는 귀한 술도 몇병 있었다. 거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쩐지 그 병들은 우리의 십육년 중에 최고의 시절을 담고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pg.14)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남편과 관계를 하고 나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든다고요. 왜 이런 단조롭고 평범한 일을 남편 아닌 사람과 해서는 안된다는 걸까, 그랬다는 거예요. (pg.24)

하지만 때로 공교로운 운명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pg.28)

미안해요. 지금 사랑한다는 말을 꼭 해보고 싶은데, 그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서 전화했어요. (pg.36)

"천사들은 술을 가리지 않아요. 모든 술에서 공평하게 2퍼센트를 마시죠. 사람의 인생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발되는 게 있다면, 천사가 가져가는 2퍼센트 정도의 행운 아닐까요. 그 2퍼센트의 증발 때문에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군요." (pg.44)

그녀는 행복을 한순간의 행운에 의존해서 얻으려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도박을 즐기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를 떠난 것이고, 그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pg.46)

"당신이 지금까지 해야 했던 일 중에 가장 힘든 게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pg.47)

상관없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컬렉션이 우리의 가장 좋은 시절을 담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행운을 가득 채운 차가운 술병들이. 그것들이 있는 한 천사에게 2퍼센트를 돌려달리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pg.52)

취한 네사람은 분명 운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단지 조금 운이 없을 뿐이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지 조금 불행한 것처럼, 그래서 단지 약간의 행운이 더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불운의 총량은 어차피 수정될 수 없는 것이니까. 나는 K에게로 그늘을 드리우며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손님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천사의 몫도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그 영혼이 씽글몰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g.53)

-

<장미의 왕자>

나라고 하는 함박눈이 미친 듯이 내려서 귀퉁이에 홀로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봄이 되어서야 당신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면 한다. (pg.59)

결핍에 대한 무심함이 오히려 그녀에게 완결의 특권을 부여했던 것일까. (pg.62)

진심은 대개 이유가 없고 단순한 것 아닌가. (pg.62)

처음 수트를 입던 날, 나는 그것이 뭔가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다른 걸 감춰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나의 정체가 될 거라는 예감도 있었다. (pg.67)

부모의 이른 죽음은 소년을 조숙하게 이끄는 한편 일생을 내부의 뭔가가 작동이 멈춰버린 느낌 속에서 살도록 만든다. 그 기억 때문일까. 수트를 입을 때에도 비슷한 기분이 든다. 모든 게 제자리를 잡으면서 동시에 정해진 궤도 안에서 끊임없이 공전하는 느낌이다. (pg.67)

사실 나는 갖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어차피 갖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버린다.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 걸맞은 무엇을 더 갖추려고 하고 욕망은 바로 거기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나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원하는 것도 없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많지만 원한다는 건 그것과는 다른 뜻이다. 그것은 욕망과도 다른 뜻일 것 같다. 내가 깨닫는 모든 것이 그렇듯 당신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는 당신을 원한 것도 욕망한 것도 아니었다. 당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안에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발광 액체가 되어서 당신에게로 흘러가 스며들어 당신이 되는 느낌이었다. (pg.70)

그동안 당신의 웃음이 향한 곳은 내가 아니아 내가 걸친 찻집 에이프런과 쟁반이었다. 그것이 나의 장미였다. (pg.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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