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이 다른 수많은 술을 똑같은 값에 내놓고 직접 골라 마시게 하는 K의 게임. 거기에서 K가 손님들에게 기대하는 점도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인간에게 아드레날린을 제공하는 데에 재미보다는 악의가 한 수 위일 테니까. (pg.11) 열여섯병. 공교롭게도 우리가 함께 산 햇수와 똑같았다. 아내가 내려놓고 간 밀봉된 시간의 단위처럼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 순간 그녀는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병에 일년씩의 시간을 지워나가는 기분으로 아내의 술을 마셔 없앴다. 아내의 컬렉션 중에는 귀한 술도 몇병 있었다. 거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쩐지 그 병들은 우리의 십육년 중에 최고의 시절을 담고 있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pg.14)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남편과 관계..
나는 당시 내가 그 얼굴을 아름답게 생각했음을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pg.21) 왜 그런 것일까? 왜 예전에 아름답던 것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추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느닷없이 깨지고 마는 것일까? 상대방이 그동안 내내 애인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왜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추억은 망가지고 마는 것일까? 그러한 상황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일까?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행복이 불행으로 막을 내리면 때로는 행복에 대한 기억도 오래 가지 못한다. 행복이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 때에만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을 잉태한 것들은 반드시 고통스럽게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의식적인 ..
기억의 의무소설 은 시간이 흘러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 남게 되었을 때를 가정하고 쓰인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한 명의 ‘위안부’ 피해자는 정부에 등록된 피해자를 말하는 것으로, 등록되지 않은 또 다른 피해자인 주인공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는 만주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말하기를 내내 망설이다 결국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 이야기는 주인공의 삶(현재)과 기억(과거)을 쉴 새 없이 오가며 ‘그녀’가 (실제 ‘위안부’ 피해자들이) 만주에 끌려가 겪었던 일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녀’가 마지막 한 명을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에는 유독 동물적 상징이 많이..
- 변형되지 않는 '마비된 기억'을 끌어안고 사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박제된 새를 내내 끌어안고 있는 심정일까. 박제된 새를 끌어안고 밥을 먹고, 버스나 지하철에 오르고, 티브이를 보고, 잠이 들고……. - 상실되었던 기억의 복구는 그렇게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그 어떤 냄새로부터, 소리로부터, 물건으로부터, 단어로부터. - 그녀는 어쩌면 매순간 증언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그 어떤 기척으로, 침묵으로……. 탄식, 비명, 흐느낌, 발광, 침묵도 증언의 한 방식이므로. 무언극을 하듯 온몸으로 끊임없이 간절하게 증언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어서 증언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침묵이 그녀에게 갑각류의 껍질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를 외..
- 펄펄 내리는 눈의 슬픔.응?그게 엄마 이름이야.그녀는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아이의 말간 눈을 들여다보았다. -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 이해할 수 없어.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느낀다.단지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가고 있다고, 부스러져가고 있다고 ..